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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2007.12.31).소림사.장가계.계림. 3일째.

달소래 2019. 6. 22. 12:08

(추억속의 옛날 중국여행기를 올린다.)


3일 째 : 2007년 12월 31일

일정 : 서주의 초왕릉과 병마총, 하남성 상구의 명나라 옛성, 개봉시의 포청천 사당과 용정공원(황궁 옛터) : 2일 째.

아침 6시에 모닝콜을 듣고 일어났다. 한국에선 일어나기 힘든 시간인데, 긴장을 했던 것 같다. 6시 반에 식사 시간인 줄 알고 내려 갔더니 7시부터 식사를 나누어 준다고 한다. 다시 침실에 들어가기도 그렇고, 식당 앞에서 만난 4명은 새벽 거리를 산책하기로 했다. 조금 걸어서 나가니 황하의 지류인듯한 강에 산보길을 잘 만들어 놓아 걷기로 했다. 날씨가 좀 추웠지만, 상쾌했다. 그런데, 이른 아침인데도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매퀘한 매연 냄새가 나의 얼굴을 찡그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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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의 아침 시가지. 도시의 아침은 여느 도시와 같이 활기에 차 있다. (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서주라는 도시에 대해서 가이드가 설명을 한다.
인구 170만의 관광 도시라기 보다는 공업도시이며 전쟁의 도시라고 한다. 서주를 주면 이웃해 있는 남경을 비롯해 많은 도시가 위험해 질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 이기도 하다고 한다.
중일전쟁 때 이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해 일본군 3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 도시를 함락시키고 이어 남경까지 취한 후 그 유명한 남경대학살을 자행했던 일이 있다고 한다.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 도매시장이 발달한 도시이며 초한지에서 유방의 도읍지이기도 한다.

아침에 잤던 호텔에서 머지 않은 곳의 초왕릉을 갔다.
약 2000년 전 유방의 형제인 7명의 왕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 중 서주 지역의 동생인 초왕이 반란에 실패를 하여 죽임을 당하니 왕능은 미완성으로 끝이 났는데도 그 규모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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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왕릉 입구의 동상 앞에서. (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옛날에 지하의 돌덩이를 깎아 통로를 만들고 여러 개의 방을 만들려면, 지금 기술로 해도 수많은 돈, 장비와 사람과 수년의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초왕릉은 도굴꾼들에 의해 대부분 도굴이 되고 값이 나가지 않는 토기 몇 점만 진열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옥으로 만든 갑옷을 금실로 꿰멨다고 하는 갑옷이 가장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병마총.
진시황 시절부터 병마총이 능과 같이 이어져 왔으나 한고조인 유방시대에 와서는 규모도 소규모에다 흙으로 만든 병사들의 크기도 작아졌다고 한다. 병마용갱의 설치 장소는 당시에 위협을 받은 대상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며 초왕릉은 서쪽이 적의 침략을 많이 받아 서쪽에 병마총이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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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왕릉의 흙으로 빚은 병사들 모습. (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병마총을 전시실에는 당시에 발굴될 때의 병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창과 칼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병사들의 흙 모형은 훼손의 위험이 있어 발굴하다가 중지한 형태를 그대로 보관해 두고 있었고, 일부는 발굴한 뒤에 모형을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서주의 초왕능을 보고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을 했다.
조조와 중국의 명의 화타의 고향인 안휘성을 지나 하남성의 상구에 갔다. 가이드는 삼국지를 예로 들며 명의 화타가 조조에게 죽은 이유를 이야기 해주고, 자기의 총명한 자식 조충이 병을 얻어 위태하자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명의 화타 한 사람 뿐인 것을 알고 화타를 죽인 것을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곳 상구를 찾는 사람은 개봉시와 정주로 가는 길목이고 명나라 때 지은 옛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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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의 모습을 확대해서 만들어 놓았다. (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상구라는 도시는 최초로 소를 길들여 농경에 이용했던 도시로도 유명하고, 중국 상고사인 상나라의 도읍지로써 장사(Business)라는 원시 물물교환이 처음 시작 했고, 최초로 불을 사용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중국 상인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상구가 속해 있는 하남성은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이며 못사는 사람이 많은 가장 취약한 성이면서도 중국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고 한다.
토지가 비옥하지 못해 농사가 잘 되지 않고 주로 옥수수를 재배한다고 한다.

상구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북적댄다. 중국은 웬만한 도시면 다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큰 도시도 아닌 상구 옛 성터 내로 들어서니 사람으로 빨리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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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구 옛성의 성문과 고풍스런 시내 건물. (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성밖은 동그랗게 호수로 해자를 만들어 놓았고, 성안은 지구를 상징하는 사각형으로 성을 만들어 놓았으면 네 개의 문을 만들어 통행을 하게했다.
성안의 건물들은 고풍스런 옛날 기와집으로 지어져 있어 고색창연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재미있는 쇼핑을 했다. 몇 사람이 노점상의 둘레에 서서 과일을 샀다. 유일하게 중국어가 좀 통하는 감악산을 대동하여 과일 흥정을 했다. 한근에 6위안 씩 하는 과일을 2근을 샀는데, 10위안을 주고 깍았다고 생각하고 가려 하는데, 노점상 주인이 자기 돈을 내보이며 뭐라고 하는데, 중국어를 한다는 감악산도 알아들을 수 없다. 옆에 있던 만들레님(?)이 잔돈 2원을 주니 그제서야 얼굴이 밝아지면서 만족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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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파는 아저씨. 그래도 표정은 여유롭다. (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말이 안 통할 때는 감이나 통박이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을 알고 우리끼리 웃은 적이 있다. (금액은 확실치 않으나 추가된 돈을 준 것은 확실함. ^^)

상구를 구경하고 다시 자동차를 타고 이동, 개봉시에 도착을 했다. 개봉시에서는 포공사, 즉 판관 포청천의 사당과 황궁 옛터인 용정공원을 갔다.

개봉시는 북송의 수도로 있을 번성할 때의 인구가 100만이 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으나 수 천 년에 걸친 몇 번의 황하의 범람과 개봉시의 홍수와 전란으로 인해 지금의 인구는 70여 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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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공사 입구 전경. (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개봉시가 유명한 것은 장구한 역사 때문이라고 한다. 그 역사는 고고학적으로 4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국도가 된 것은 기원전 364년, 전국 칠웅의 하나인 위나라의 수도 대양으로 번영을 누렸고, 후야, 후당, 후한, 북송, 금 등 일곱 왕조의 수도였다고 해서 七朝古都라고도 부른다.
1891년 봄에 용정의 호수 바닥에 있는 진흙을 준설할 때 명대의 건물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청나라 초기에는 하남성 총독이 같은 자리에 용정을 짓고, 멀리 북경에 있는 황제에게 축수를 드리는 의식을 거행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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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만들어진 용정공원의 메인 건물. 안에는 옥좌와 조명 시설까지 있어 돈을 주면 황제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또 명나라 홍무 11년 태조 주원장은 개봉에 책봉된 그의 다섯째 아들 주왕 주소에게 자신을 위한 궁궐을 지으라고 했는데, 이것의 이름도 자금성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궁전은 명나라 말기인 숭정 15년 황하의 대 범람으로 지하 몇 십 미터 아래 묻히게 되었다.
포공사와 용정공원은 커다란 인공호수가 황궁으로 가는 양쪽에 만들어졌는데, 도굴꾼들에 의해 파진 웅덩이와 도굴 방지용으로 아예 호수를 만들었다고 하니 역대 왕조의 수도에서 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도굴되었는지 감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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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공사에 들어서면 옛 것은 별로 없고 현대식 조형물만 있다.(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개봉의 포공사.

포공사는 개봉시 백성들이 북송의 정치가인 포청천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제사 사당으로 건축 면적은 1800평방미터이며 대전 동서배전 벽낭 비석정자등 송나라 풍격의 건축이 지어져 있다.
포청천 인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도 가이드는 설명해 주었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포청천 이마의 반달은 실제로는 낫으로 인한 상처이고, 얼굴을 검게 표현 한 이유는 중국의 경국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흰 얼굴은 사기성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검은 얼굴은 강직함을 의미하며, 붉은 얼굴은 의리를 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포청천은 드라마와는 달리, 실제로는 관리로 3개월을 근무를 했는데, 한 가지 사건의 해결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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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청천의 동상(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이 사건은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는데, 바람둥이 유부남의 사건을 권력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의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에 급제해 황후의 사랑을 받아 사윗감으로까지 촉망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서생은 시골에 자식을 둘씩이나 거느린 유부남으로 그 아내가 억울함을 포천청에 호소하였다. 이에 포청천은 그 사실을 밝혀내고 바람둥이 서생을 개작두에 처벌을 하지 않으면 자기를 용작두에 처벌하여 줄 것을 황후와 공주가 보는 앞에서 왕에게 요구해 관철을 시켜 권력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판관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현지에 용작두와 범작두, 개작두가 전시되어 있는데, 용작두로 처형 이 되면 용으로 다시 태어나고, 개작두로 처형이 되면 개로 환생 된다고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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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공원 입구의 어가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화려한 기생들은 간 곳이 없다.(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또 포공사에 있는 것 중 당시에 만들어진 비석에 개봉을 거쳐간 관리들의 이름이 있는데, 포청천이 있는 이름에 수많은 사람들이 만져 돌이 패인 것도 볼 수 있었다.

개봉의 용정공원.

용정을 중심으로 한 정원공원. 용정 앞의 돌계단을 3층 72계단으로, 중앙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공원이 있는 장소는 역대왕조의 왕궁이 있었던 곳. 용정은 1692년 명대의 석탄산 터에 세워진 작은 정자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정자에는 황제의 비가 모셔져 있으며, 황제는 용과 견주어져 있어 용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734년 만수궁 이라고 불렀다가, 그 후 19세기 도교 궁관이 되었고, 현존하는 건축물의 대부분은 1949년 이후에 재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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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공원 양 옆의 호수.(크게 보시려면 마우스로 눌러주세요)
황궁옛터에 앞의 거리(“어가”라고 한다)에는 청루라고 하는 기생들이 시, 음악, 가무를 했던 곳이 있었는데, 당시 황제도 밤에는 평복을 갈아입고 놀러 오기도 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평복을 입은 황제도 청루에서는 기생들의 손목을 한번 못 잡았을 정도로 기생들의 품위와 정조가 대단했다고 한다.

용정공원을 구경하고 개봉에서 정주로 오는 10차선의 대로.
2007년의 마지막 붉은 해가 이국의 땅에서 빨간 노을과 함께 진다.
길 옆에 심어놓은 삭막한 포플라 숲의 나뭇가지 사이 멀리 지평선 아래로 주홍빛 물감을 뿌리며 저무는 해를 보니 붙잡고 싶은 마음이다.
이국 땅에서 마지막 지는 해를 볼 수 있으니 만감이 교차된다.
내년에는 새로운 각오로 임할 것을 다짐하며 2007년의 마지막 빨간 해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