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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철학에 있어서 존재와 인식의 상관성.

달소래 2013. 4. 26. 01:04

노자철학에 있어서 존재와 인식의 상관성

 

. 시작하는 말

 

도는 도가철학의 종지로서 특히 노자철학의 중심개념이다.1) 노자철학은 도에서 시작해서 도로 끝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에 관하여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그래서 노자철학은 도에 포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노장에 있어서나 동양철학 일반에 있어서 도 개념은 광대하고 심원하며 또 복잡하다.2) 중국철학에 있어서 도는 처음에 도로를 의미하였으나, 뒤에는 도덕법칙 내지는 우주자연의 법칙을 포함하는 철학적 본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노자의 도는 특히 인위를 배제한 자연의 개념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종래의 제자백가가 지녔던 도의 관념과는 다른 특징을 지닌다. 노자에 있어서 도라는 개념은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가명일 뿐 실재적 개념은 아니다. 노자는 항상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경계심을 갖고,3) 도를 말한다.4) 따라서 노자철학에 있어서는 도가 하나의 언어로 남는 한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도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5)

 

노자는 도를 언표할 때마다 긍정진술보다는 부정진술을 선택한다. 그의 부정진술 안에는 개념 상호간의 대립과 모순관계가 논리적 역설의 긴장감을 동반하면서 끊임없이 등장한다. 또한 노자는 존재의 , , 滿, 退, , 등의 상대적 관계를 자주 거론하는데, 노자는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중시하고 강조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이다. 노자는 전자의 부정을 위하여 방편적으로 후자와 같은 반정립을 제시할 뿐이다. 물론 이와 같이 노자가 대구의 언어를 통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은 대립적 존재자들의 실재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모든 것이 상대적인 실재임을 설명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어버리는 대립적 존재자들의 대립성이나 모순성이 우리의 인식과 무관하게 실재한다는 믿음은 우리들의 착각임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노자철학은 일방적인 가치의 우열을 상정하지 않는다. 즉 노자는 순수형상 또는 순수존재인 도는 모든 상대적 차별성, 언어적 규정성을 넘어선 것이므로 이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대립관념, 개념규정으로부터 벗어나야 됨을 말하려는 것이다. 궁극적 존재로서의 도는 우리에 의하여 경험되어진 개별적 사물처럼 그렇게 언표될 수 없는 것이며, 만약에 그렇게 구별되고 언표된 것이라면 이는 이미 궁극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6)

 

노자는 또한 도를 단지 부정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설명하지는 않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의 근원적이며 무한한 생명으로서 인식하는 긍정을 자체 내에 암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도의 인식은 어떤 타자에로의 지향이 아니라, 스스로의 근원성에로의 복귀 또는 환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환원의 종점에서 자연을 만나게 된다. 노자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인간에 상대되는 존재가 아니며 의식적인 존재에 대립하는 무의식적인 존재가 아니다.7) 노자의 자연은 천인과 사물을 포괄하며 또 그 속에 내재하면서도 그 어떤 것에도 한정되거나 제약되는 것이 아닌,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가 자재하는 상태, 운동하는 모습을 의미한다.8) 그러므로 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대립을 전제로 하는 모든 관념이나 사유의 형식으로부터 벗어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실상 노자의 도는 이성적 추리과정을 통하여 이해 가능한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감각경험이나 이성적 사유를 배제한 직접적인 직관적 파악에 그 의의가 있다. 이 때 직관이란 순수직관을 말하며, 순수직관은 감관작용과 이지작용을 초월한 것으로서 가장 잘 인식하는 방법을 의미한다.9)

 

이렇게 본다면, 노자철학에 있어서 존재와 인식은 깊은 연계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관계가 단순히 일상적 친속관계에 머물러 있지 않은 노자철학 특유의 심오함과 맞물려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노자가 도를 설명하는 방식이 도의 인식방법 및 체득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에 필자는 다음에서 노자철학에 있어서 도가 가진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것을 바탕으로 노자가 도를 설명하는 논리방식이 인식의 문제와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는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

 

노자는 도덕경의 개권 벽두로부터 도를 도라고 말하면 참다운 도가 아니다”10)라고 하면서 도에 관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런데 노자철학에 있어서 도는 도라고 말할 수 없는 자기 부정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를 통해 도를 설명해야만 하는 후대의 노자연구가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자가 이처럼 자신의 철학에서 부정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도가 인간의 의식적 모형에 의하여 제약될 수 없는 무규정적인 근원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이 도에 투영되는 순간 도는 인간에 의하여 임의로 제약받고 만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이 투영된 세계의 성격은 항상 상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11) 노자는 이러한 세계의 상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상계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들은 상대적인 사물들이다. 이들은 서로가 독립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그 근원적 측면에서 본다면, 주객이 미분화된 통일체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주객미분화의 통일체로부터 현상적으로 분리된 사물들이 각자 타자와의 연관적 측면에서 그 관련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면, 이들은 존재의 근원을 상실당한다. 현상적 사물은 서로 상대적이면서도 그 존재의 기반을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자신의 도덕경안에서 설명되는 도에 관한 내용들이 매우 쉬운 것이라고 한다.1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에 나타난 노자의 도는 여전히 매우 심원하며 이해하기에 난해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논리적 분석을 불허하는 도를 억지로 논리적 틀 안으로 끌어들여 임의로 규정하려고 하는 우리의 학문적 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논리를 넘어서 있는 도를 논리적으로 규정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래서 노자는 분석적 논리에 기반을 둔 일상의 학문적 태도를 부정하는 것이다.13) 그러나 우리는 학문적으로 노자의 도에 대하여 또한 침묵만을 지킬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노자가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지 알아보아야만 한다. 여기에서는 도덕경 25장의 해석을 중심으로 노자의 도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덕경 25장을 다음과 같이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누어 분석해보기로 한다.

 

[1] 노자는 도가 천지만물의 시원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有物混成, 先天地生.”14)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문장 안에는 우리가 노자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복잡하고도 어려운 해석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노자철학의 전체 구도는 생성론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존재론적인 것으로 조감된다. 그래서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혼성의 물이 있어서 천지보다 앞서서 생하였다.”는 것과 혼성의 물이 있어서 천지가 된 것보다 앞섰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이것을 혼성의 물에 논의의 초점을 두고 파악한다면, 천지보다 먼저 혼성의 물이 생겨났다.”는 것과 천지가 되어진 것보다 먼저 혼성의 물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결론적으로 노자철학에 있어서 의 해석은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 하면 혼성의 물은 도를 지칭한 것인데15) 도가 천지보다도 먼저 생하였다고 한다면, 도는 천지보다도 앞서기는 하지만 도가 한 것이라는 의미가 되므로 이것은 오류이다. 이러한 해석은 도를 생성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도가 생한 것이라고 한다면 도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가 있을 것이며, 또한 그 이전의 이전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소급해가다 보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결국 무한소급의 오류를 발생하게 한다. 이렇게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면, 도는 만물의 근본으로서16) 만물의 가장 오묘한 것17)이 될 수 없을 것이며, 현상사물이 근원으로 환원(복귀)18)할 수 있는 존재론적 근거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의 해석과 같이 혼성의 물이 있어서 천지가 된 것보다 앞섰다.”고 보아야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천지가 나타난 것보다 도는 먼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19) 이것은 도와 현상사물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상대적 존재인 천지는 혼성의 물인 도로부터 전개된 것이 되어 논리적으로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혼성의 물이 현상세계보다 먼저 있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로부터 현상의 분화가 가능하며, 존재의 속성이 운위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존재의 속성을 설명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논리적 선후로 말해서 존재는 속성에 앞서기 때문이다.20) 그러므로 혼성적 존재는 속성에 앞서는 것이다. 속성이란 항상 상대적이지만 속성을 넘어선 근원적 존재는 절대적이다. 따라서 혼성은 무엇인가 서로 속성이 다른 것들이 섞여서 구성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혼성은 인간의 상대적인 분석과 판단을 넘어선 근원적 미분화의 통일자를 형용한 말이다. 결국 노자의 도는 현상의 근원자로서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소자유는 대저 도는 맑은 것도 아니고 탁한 것도 아니며, 높은 것도 아니고 낮은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며,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 것으로서 혼연하게 그 실체를 이루고 있다. 그것이 인간에 있어서는 본성이 된다. 이렇기 때문에 노자는 혼성적 존재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것이 생하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은 담연하게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서 천지가 그 가운데서 생한다.”21)고 한다. 총체적 사물로서의 혼성적 존재는 바로 도이다. 이것은 모든 사물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적 근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여진 물의 차원은 결코 현상적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쪼갤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는 무연장성으로서 유와 무가 혼일되어 있는 근원적 존재를 말하기 때문이다.22) 이 근원적 존재가 다름 아닌 도이다. 도는 천지만물의 능생적 창조자도 아니요, 또한 그 자신이 절대자에 의해서 창조되지도 않는 것으로서 자신과 전혀 다른 그 무엇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법이 없는 자존적 존재이다. 그래서 자존적 존재로서의 도는 스스로 독립해 있으며, 자기원인에 의하여 그 스스로가 유동 변화할 뿐 어떠한 타자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도 이외에 또 다른 타자가 정립된다면, 이 때의 도는 도일 수 없다. 타자의 정립이란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도는 어떠한 형상이나 운동으로서 규정되지 않는다. 도는 그 스스로 존재하는 실재로서 무형상의 형상이며 무동작의 동작이다.23) 그러면서도 도는 천지만물의 무한한 활동을 가능케 하고, 모든 형상을 이루게 하는 현상적 사물의 본원적 존재근거이다.

 

[2] 그래서 노자는 혼성된 것이 있어서 천지가 된 것보다 앞섰다.”24)는 문장에 뒤이어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소리도 없고 일정한 형태도 없어서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가 없다. 오직 독립하여 자존하면서도 변함이 없으며(獨立而不改), 모든 것에 두루 미치면서도 다함이 없어서(周行而不殆) 천지만물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25) 여기에서 노자는 도가 적요하다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소리도 없이 고요하며 작위가 없이 행위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오직 독립하여 자존하면서도 변함이 없다는(獨立而不改) 말은 도의 절대성과 영존성을 뜻하는 것으로서26) 그 스스로가 근본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간적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모든 것에 두루 미치면서도 다함이 없다는(周行而不殆) 말은 전면적이면서 순환적인 존재의 운행이 끊임없이 진행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노자는 결론적으로 도가 천하의 시원,27) 즉 절대적 근원자가 된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도는 노자철학의 중심개념으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본원적 존재이며, 우주가 생겨나는 힘이고, 만물이 운동 변화하는 법칙이며, 인간 행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28)

 

[3] 그런데 이러한 도는 본래 무명29)이므로 이름을 붙여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노자는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억지로 그것을 도라고 하였다.”30)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도라는 말은 억지로 붙여진 가명에 불과하다. 이름이 붙여진 것은 상대적인 사물의 경우에 해당한다.31) 구체적인 사물의 명칭은 사물 그 자체의 속성으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임의적 약정이다. 명칭은 사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 쪽에서 나온 산물이다. 이처럼 상대적인 사물의 명칭도 그 사물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데 도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노자가 도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한 도덕경5천여 언은 원래 말할 수 없는 것이데, ‘억지로 말하자면이라는 가정이 전제된 아래 진술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32)는 역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도를 또한, “억지로 형용해 보자면 포용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러자니 두루 유행하여 그치는 바가 없다고 하겠으며, 그러자니 무한하다고 하겠으며, 그러자니 되돌아온다고 하겠다.”33)고 말한다. 이것은 도의 작용적인 측면을 형용한 말이다. 즉 도의 작용은 자신이 지닌 존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확산과 수렴을 반복함으로써 한번은 확산되고 한번은 수렴되는 과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의 현상들을 현현시키는 과정 중에 지속적 자기동일성을 지니면서 상대적 현상들을 확산 수렴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적 현상들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에 자신의 존재근거를 두고 유동변화의 과정을 겪으며 수렴과 확산의 작용을 지속한다는 말과 통한다.

 

[4] 노자는 세계의 모든 현상적 존재들은 귀중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노자는, “도는 큰 것이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 또한 크다. 이 세상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으니, 사람도 그 하나를 차지한다.”34)고 한 것이다. 도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크다는 것은 도 이외의 현상적 사물들이 도에 그 존재의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는 도에 의해서 전개되는 작용에 따라 단계적으로 서로를 본받는다. 그래서 노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35)고 한다. 이를 통하여 보더라도 사람과 땅과 하늘과 도, 그리고 자연은 서로 단절적 구조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들의 관계가 단절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차단되어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 다른 것을 본받을 수는 없을 것이겠기 때문이다. 노자는 세계를 결코 이원론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명제에 있어서 등장하는 도와 자연의 관계설정이다. 도가 자연을 본받는다고 한다면 도는 도 밖의 다른 자연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경의 전후 문맥을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불식시킬 수 있다. 노자는 이 세계에 큰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그 네 가지가 다름 아닌 , 하늘, ,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존재를 본받는 방식은 사람 → ② → ③ 하늘 → ④ → ⑤ 자연이라고 하여 다섯 단계를 설정함으로써 앞서 네 가지의 존재를 제시했던 것과는 서로 모순을 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개념이 명사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 또한 명사로서 사용된 것일까? 그리고 자연은 도 위에 있는 또 다른 존재인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노자에 있어서 자연은 명사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개념이기 이전에 한 대상이 존재하는 상태를 강조하여 쓰인 서술어이다.36) 도와 자연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의 양면적 표현이다. 따라서 도가 자연을 본받는다고 한 것은 도가 자기 자신의 존재원리를 스스로 본받는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노자철학에 있어서 자연이란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된 실체적 개념이 아니라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가 자존하고 스스로 운동하는 본연의 상태를 서술한 상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여기에서 자연이 존재의 실체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면, 노자는 당연히 이 세상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다.”고 하지 않고 이 세상 안에는 다섯 가지 큰 것이 있다.”고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도 전후문맥이 서로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이 실체적 개념으로 사용되어 도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정립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 하면 도가 곧 자연이요, 자연이 곧 도이기 때문이다.

 

. 존재와 인식의 상관관계

   

노자는 미와 추, 그리고 선과 불선, 유와 무가 서로 다른 실체를 지닌 것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노자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알지만 이것은 추악한 것이며, 천하 사람들은 모두가 착함을 착한 것이라고 알지만 이것은 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가 서로 드러나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어지며, 긴 것과 짧은 것이 서로 나타나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서로 기울어지며, 성이 서로 조화되고, 앞과 뒤가 서로 따르는 것이다.”37)라고 한다.

 

만약 유, , , , , 후가 각각 고정된 개별적 실체이며 또한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면 이들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의 인식주관에 의해서 서로가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일 뿐 본래부터 고정된 존재로서 상호 독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관계는 인식주관이 어떤 기준을 갖느냐에 따라서 항상 가변적이다.38) 그러므로 이와 같이 상대성을 띠고 세계의 전면에 떠오른 존재들은 존재자일 뿐 진정한 의미의 존재는 아닌 것이다. 이것은 존재가 표상에 의하여 의미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원존재와 의미화된 존재는 서로 다르다. 본원존재의 일원론적 성격은 인간의 의식에 의하여 표상화되면서 이원론적 분열을 일으키고, 급기야 세계는 상대적 대결구도를 갖기에 이른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표상된 존재를 인식하는 것일 뿐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 의미화된 존재의 근원적 약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인식이란 인식주관과 인식대상 사이의 표상관계의 정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표상이 어떻게 대상에 대하여 타당성을 갖는가, 표상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표상 가능한 세계 내지 대상과의 관계는 어떤 것이며, 또 인식의 구조는 어떤 것인가 하는 따위의 문제가 인식이론의 주된 문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의 문제는 그것만으로 고립되거나 완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식은 이미 인식대상이라는 객관측의 존재자와 인식주관이라는 존재자를 전제하느니 만큼, 존재자와 존재자와의 존재관계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인식은 상호간의 존재근거로서 정립된다.39) 이러한 측면에서 존재 없는 인식이 있을 수 없고, 인식 없는 존재가 정립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노자는 존재 아닌 존재를 인식하려고 하고, 인식 아닌 인식으로 존재를 인식하려고 한다. 이러한 역설 속에는 존재와 인식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즉 존재의 범주 안에는 본원존재와 의미화된 존재가 서로 다른 차원이면서도 별다른 구분 없이 함께 거론되고, 인식의 범주에는 분별적 인식과 무분별적 인식이 다르게 존재하지만 이들 또한 구분 없이 이야기된다. 이 때 본원존재는 무분별적 인식과, 의미화된 존재는 분별적 인식과 서로 조응한다. 따라서 노자가 존재 아닌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의미화된 존재 아닌 본원존재를 인식한다는 말이며, 인식 아닌 인식을 한다는 것은 분별적 인식 아닌 무분별적 인식을 한다는 의미이다. 노자의 역설적 언어체계를 이처럼 단순화시키면 문제는 생각보다 아주 명료해진다. 인식에 있어서 서로 조응될 수 없는 분별적 인식과 본원존재가 교차되어 만나면 본원존재는 오히려 왜곡된 채 인식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낳는다. 마찬가지로 존재에 있어서 본원존재가 무분별지에 조응하지 못하고 분별지와 교차되어 만나면 본원존재의 일원론적 존재질서는 파괴되어 분열된다.

 

그러므로 노자철학에 있어서 존재와 인식의 관계는 그 이중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타자와의 차별적 관계정립을 의미한다. 그래서 노자는 존재와 인식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의 인식이 감각지각과 이성적 사유에 의한 분별적 인식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노자는 도덕경의 도처에서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가 감각에 의해서는 인식되지 않으며, 우리의 마음이 도에 합치됨으로써만 도는 깨달아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40) 이것은 도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존재사물의 궁극적 근원자로서의 도는 지각이나 이성에 의하여 규정되고 한정되어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개념적 파악을 불허한다. 지적인 이해로서의 도라는 개념은 한낱 단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요,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41)라고 한다. 즉 도는 어떠한 규정도 불허하는 존재로서 의 세계이므로 어떤 이름을 붙여 개념화할 수도 없고, 무엇이라고 언표할 수도 없는 것이다. 도를 개념화하여 인지할 수 없는 이유를 노자는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음을 이름하여 라고 하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음을 이름하여 라고 하며, 잡으려 해도 얻을 수 없음을 이름하여 라고 하니, 이 세 가지는 따져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뒤섞이어 하나됨이라고 하는 것이다.”42)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도가 단순히 허구적 관념상의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근원적 존재이다. 다만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을 갖고서 도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에서 도는 이미인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이미란 존재의 무규정성을 의미하는 용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이미라고 규정되기는 하였지만, 이들은 자체 내에 자기 규정성에 대한 부정을 내포한다. 미는 임시로 가설된 방편적 용어에 불과하다. 노자철학에 있어서 이러한 무규정성을 대표하는 부정사가 바로 이다. 노자의 철학이 무의 철학이라고 불리울 만큼 도덕경오천여 언 속에서 부정사 무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노자가 말하는 무는 유무의 상대적 관계에서 논의되는 상대적 무가 있는가 하면, 양자의 관계를 포월한 절대적 무가 있다. 노자는 우선 도가 현상 만유의 근원자라는 점에 주목하여 도의 본상을 설명하는 방편으로 무와 유를 논의한다.

 

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무와 유의 관계에 관하여 학자들은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43) 유인희는 노자에 있어서 도와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 말은 무이다. ‘有生於無에서의 무는 환원의 최종단계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에게서 무의 이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많이 논해지고 있다. 그러나 노자의 무는 볼 수 없다는 의미로서 無狀, 無象, 無物과 같이 도를 설명하거나 형용하는 말에 불과하지 존재무 개념은 아니다.”44)라고 한다. 그러나 김충열은, 무는 논리적인 면에서 부정으로서의 무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본체의 시원을 의미한다고 한다.45) 그리고 오경웅은 도는 무이면서 유이다. 무는 형이상이요 유는 형이하다. 도는 유와 무를 초월해 있으면서 유와 무를 함께 다스린다.”46)고 본다. 또한 김항배는 노자가 말하는 무는 순수무 절대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화되기 이전의 존재 그 자체 즉 순수존재를 뜻하는 것이고, 유도 단지 유한한 사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존재의 표상이라고 보는 것이다.”47)라고 한다.

 

이상에서 도와 무유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았는데, 부정성으로서의 무의 문맥에서 보자면 도와 무는 개념상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무는 도를 상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도는 단일한 전체로서 혼일한 상태의 존재이므로48) 어떠한 개념이나 이름으로써 무엇이라고 한정해서 규정할 수 없으므로 다만 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는 존재이지만 무는 아니다. 그러나 무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무는 노자철학의 논리상 부정성으로서의 무이다. 무는 정유, 분별지, 작위를 배제한 순수한 원초적 상태를 말한다.49)

 

그러므로 무는 도체의 초감각적 절대성을, 유는 도의 작용에 의하여 전개되는 변화 속의 현상계를 형용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무명은 천지의 시원이요,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다.”50)라고 한 것은 도체의 절대성을 무명이라고 하고, 도체의 현상성을 유명이라 하여 표현을 달리한 것일 뿐, 유명이든 무명이든 다같이 같은 것으로서 인식을 통하여 언어로 규정됨으로써 이름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한데 일컬어 신비롭다고 하는 것이다.51) 다시 말하자면 도덕경에서 현묘하다고 할 도를 무 또는 무명이라고 하거나 유 또는 유명이라 한 것은 만물의 시원으로 표현하느냐 모체로 표현하느냐의 차이일 뿐인 것이다. 도덕경에서는 도의 작용이 천지만물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과정을 가리켜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한다.”52)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체로부터 현상에로 우주가 생성 전개되는 우주 생성의 도리를 논하는 우주론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 즉 우주가 어떻게 있느냐의 문제에 초점을 둔 것이다. 즉 이것은 시간적 선후의 과정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논리적인 의미에서의 설명이다. 따라서 노자철학은 존재론적 토대 위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노자는 우주의 생성에 관한 존재의 시원을 탐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인식의 상관관계를 주목한다.

 

그런데 일찍이 관봉과 임율시는 노자철학을 유심주의라고 규정한 그들의 공동연구에서 노자의 도가 常無常有의 통일이라고 보았다. “도는 상무이기 때문에 상유일 수 있으며, 만약 상무가 아니라면 그것은 구체적 사물이 되어 결국 소실되기 때문에 상유일 수가 없다. 노자의 도는 常道이기 때문에 그것은 상무와 상유의 통일이며 이 양자는 상무에서 통일된다. 이러한 도가 곧 노자적 형이상학의 본체이다.”53) 그런데 도가 이미 상무와 상유의 통일이라면 이 때의 상무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상무와 상유는 다시 상무에서 통일된다고 한 것이다. 이 때 전자의 상무와 후자의 상무는 다르다. 전자의 상무는 방법적 의미가 강하고 후자의 상무는 순수존재로서의 도를 지칭한다. 그런데 도로서의 상무는 어떠한 물질력도 갖지 않은 허무적 존재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54) 그러나 노자철학에 있어서 물질력이 배제된 존재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유적 경향성을 지지하지 못하는 일체의 허무적 존재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는 허무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요, 물질적인 것에 대립되는 관념적인 것만도 아니다.55) 노자는 도가 오직 황홀하여 구별도 없고 아득하며 어두울 뿐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온갖 동작과 물상과 정기와 신험이 있다고 한다.56) 도는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으니 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도를 무라고 할지라도 이 무는 구체적 사물로 고정화된 개별적 존재에 대비해서 말하는 것일 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Zero)과 같은 뜻은 아니다. 그래서 풍우란은, 도가 천지만물이 생하는 까닭의 총원리이므로 도는 영과 같은 뜻의 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57)

 

그래서 노자는 혼과 백을 하나로 통일하여 서로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기운을 전일하게 모으고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할 수 있겠는가? 더럽혀지고 물들여진 것을 씻어내고 심오한 경지에서 살펴보아 흠집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58)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노자는 정신과 육신을 별개의 실체로 간주하여 이원화하려는 분별적 태도에 대하여 부정적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노자철학이 유심론이라든가 유물론이라고 하는 대립된 관념으로 규정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노자는 오히려 이러한 대립적 견해를 하나로 통일하여 우리의 정신이 본원존재로서의 도와 하나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우리의 감각이나 의식이 끊임없이 밖을 향하여 치달리는 것을 붙잡아 그 기운을 전일하게 되도록 다스리라고 한다. 노자는 일상의 이원적 대립을 하나로 해소시켜 존재와 인식을 통일시킬 수 있는 가능적 계기를 마음에서 찾는다. 그래서 노자는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고, 또한 이 신비로운 마음의 거울을 닦으라고 한 것이다.59) 즉 감각적 대상의 차별상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대립적이거나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우리의 사유형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비칠 수 없으므로 이것을 씻어내어 마음 거울을 밝게 할 때에 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로운 마음의 거울은 존재와 인식의 측면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즉 거울에는 자기의 의사와 무관하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비치므로 여기에 존재와 인식이 동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같이 동거하지만 그들 사이의 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자의 도는 현상을 초월한 것도 아니며 현상에 대립한 존재도 아닌 현상 그대로의 모습 자체이다.

 

따라서 도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천지만물의 본상을 있는 그대로 비친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천지만물의 본상을 인식하는 것이 곧 도를 인식하는 것이요, 도를 인식하면 천지만물을 도로서 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노자가 존재와 인식의 상관관계를 통하여 밝히고자 한 것은 감각적 지각의 한계를 지적함과 동시에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사유형식을 외계에 투사한 인식방법을 비판하고, 천지만물의 존재근거로서의 도를 통찰하는 순수 직관의 방법을 제시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 존재 인식의 두 길 : 분별지와 명지

  

현상계는 노자가 말하는 유명의 세계로서 상대적이며 차별적인 유한의 세계이다. 이 상대적 현상계의 인식은 의식지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노자는 항상 의식지향이 있음으로써 그 분별을 본다.”60)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항상 의식지향이 있다는 의미는 인식주체로서의 마음이 인식대상으로서의 사물에 접함으로써 존재사물을 의식의 대상으로 가지는 류의 경험적 인식의 태도를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호오의 감정에 의하여 사물의 가치를 분별하는 평가적 태도를 취하기 이전에 그에 선행하여 가지는 지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의식지향으로써 본다는 것은 존재사물의 현상적인 모습들을 의욕의 대상으로 삼되 그 호오를 가리는 정의적 요소가 아직 개입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이를 그대로 표상하고 분별하며 포착한다는 것이다.61)

 

그런데 노자는 우리가 존재사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분별적 지식과 정의적 욕망이 우리의 인식기능을 오히려 마비시킨다고 강조한다. 노자는 분별지가 사물에 대한 부당한 시비와 호오를 생겨나게 한다고 하여 우리의 의식이 대상을 파악함으로써 얻어지는 류의 이러한 지식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62) 또한 노자는 우리의 주관적 평가가 사물의 진실을 왜곡한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인식주관으로서의 마음과 인식대상으로서의 사물은 다 같이 끊임없는 변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음과 사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지식 또한 고정 불변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인식대상 자체로서만 보더라도 대상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의 의식이 변화 중에 있는 사물의 한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지식을 구성하는 한 이것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에 포착된 사물현상은 온전한 본디의 모습이 아니라 임의로 구획되고 단절된 부분적인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분별의식은 자기와 다른 것, 즉 대상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노자는 주객의 대립적 관계에서 얻어지는 분별지를 부정하고 명지를 체득하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노자는 차별적이고 유한한 인식태도를 버리고 절대적 도의 경역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도는 우리의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대상지향적인 의식에 의해서는 인식할 수 없다.63) 노자는 도를 그 무엇이라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를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이것은 분별하는 우리의 지적인 요구를 넘어선다는 말이 될 것이며, 그것은 또한 개념화할 수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를 알고, 개념 없이 그리고 언어 없이 존재와 직접 접촉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64)

 

노자는 분별지를 부정하기 위하여 무지를 말한다. 그래서 노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요,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 병통이다.”65)라고 하였다. 이것은 노자의 분별지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런데 후외려는 노자의 무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자는 사회의 문학예술은 모두 불합리한 표현이며 일체의 정신적 소산, 즉 정신문화는 모두 군더더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자는 극단적인 무지식을 주장하였다.”66) 그러나 노자가 무지를 말했다고 해서 이와 같이 그가 일체의 지식을 부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노자가 무지를 주장한 것은 분별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다. 노자는 주객대립의 관계에서 도래하는 상대적인 인식방법을 탈피할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시간적 제약을 초월한 영원의 세계를, 그리고 공간적 제약을 초월한 무한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추론하고 변별하며 시비하는 상대적 지식을 부정하고, 도의 진상을 알아 도의 움직임과 일체가 되는 근원적인 절대지를 긍정한다. 명지는 분별지의 세계를 초월한 무지의 지이며, 도의 움직임의 진상을 아는 전능한 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는 일차적으로 대립과 모순을 포월하는 근원처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노자에 있어서 무지란 지가 심화하여 상대적 지식을 넘어서 무지로 된 것, 곧 지식의 자기탈각인 것이다.67)

 

노자는 인식에 있어서 감각적 경험과 이성적 사유를 모두 부정한다. 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서 잡념을 씻어버리고 대상에 대한 인식의 지향성을 배제하여 망령된 견해를 제거하며 내적 직관에 의한 관조를 해야 한다. 이러한 경지의 마음은 아직 아는 자와 알려지는 자가 갈라지기 이전의 마음이다. 주객이 분열되지 않은 도에 일치될 때 마음은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 따라서 노자의 이른바 무지는, 주객이 서로 분화되기 이전의 마음에 계합 또는 복귀되면 아는 자와 알려지는 자의 차별이 없다는 의미를 지닌 무지인 것이다.68)

 

그래서 노자는 항상 의식지향이 없음을 통하여 도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69) 항상 의식지향이 없음이란 존재사물을 의식의 대상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고 이 대상을 이러저러한 것으로 표상함이 없는 태도로서, 항상 의식지향이 없이 보는 것은 이와 같은 태도로써 존재를 직접 파악하는 것, 즉 원초적인 순수직관을 말한다. 이는 말하자면 주관과 객체와의 대립 이전의 인식으로서 인식주체로서의 마음과 인식대상으로서의 사물이 마주 섬이 없이 이루어지는 사유 이전의 인식이다. 근원 자재의 세계인 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주객대립의 대상적 파악의 태도를 일체 배제한 허심 무위의 경지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70)

 

그런데 무지가 명지를 얻기 위한 인식상의 방법이라면, 그러한 방법에 의해서 진리를 체득하는 것을 명지라고 한다. 명지는 무지에 의해서 체득되는 고차원의 지로서 분별지가 전혀 없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무지의 지이며 직관적 지이다.71) 노자는 그 빛을 써서 그 밝음에 다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으리니, 이를 일러 항상됨을 잇는다고 한다.”72)고 하였다. 여기에서 빛이란 명지를 의미한다. ‘襲明’73)이나 微明’74), ‘知上曰明’75)과 같은 밝음이 바로 명지이다. 그리고 항상됨을 잇는다는 것은 영원한 도의 작용을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自知者明’76)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와 같이 노자는 自知를 긍정한다. ‘자지란 무엇인가? 자연의 앎이다. ‘이란 무엇인가? 참된 앎, 절대적인 앎이다. 따라서 자지또한 절대적인 앎을 의미한다. 이 경우 자지란 자연히 아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이기도 하다.77) 그런데 자지는 타인과 상대되는 자기를 안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이미 타인을 아는 것이고, 이는 상대적 지식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여기에 대하여 왕필은 남을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일 뿐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아는 사람이 지식을 넘어선 것만 같지 못하다.”78)라고 해석하였는데, 대체로 온당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 노자는 절대지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상대지를 부정하는 것만은 아니다. 의 단계가 서로 다름을 나타내면서 지의 단계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상대적 지식을 참된 지식이라거나 절대적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상대지를 넘어서지 않으려고 하는 입장을 배척하는 것이다.79)

 

그래서 노자는 학문을 하는 것과 도를 체득하는 방식이 서로 다름을 구분한다. “학문을 하면 날마다 더해 가지만, 도를 체득하려면 날마다 줄여야 한다.”80) 여기에서 학문을 하는 것은 지식을 구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81) 이러한 지식이란 일체의 외물에 관한 분별적 지식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대상사물에 관한 경험적 지식과 사유 분별을 쌓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이 오히려 장애가 된다. 도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험적 지식과 사유 분별로부터 멀어져야만 한다. 도는 일체의 분별지를 덜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의 영역으로부터 분별지가 철저히 제거되면, 우리는 일체의 선입관이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노자는 우리의 의식을 거울처럼 맑게 하라고 한다.82) 노자에 있어서 명지의 체득은 마치 거울에 사물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듯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다른 어떤 매개를 사용하지 않고 존재와 의식이 원초적으로 만남으로써 존재가 의식 가운데에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83) 우리가 도를 체득하게 되면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문을 통해서 밖을 보지 않고도 천도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대상세계를 향하여 멀리 나아가면 나갈수록 더욱 더 멀어지고, 외부세계에 대하여 알려고 하면 알려고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돌아다님이 없이 모든 것을 알며, 보지 않고도 이해하며, 무위로써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84)

 

이러한 노자의 설법은 그의 철학을 신비주의적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노자는 오히려 일체의 신비주의적 요소를 거부한다. 여기에서도 노자의 언어 진술방식은 대단히 역설적으로 표명되고 있는데, 우리가 창문을 통하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는 것은 감각경험에 의지하지 않을 때만이 우리는 세계의 존재질서에 자연스럽게 동참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외부세계에 대하여 알려고 하면 알려고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것은 분별지의 한계를 단적으로 지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분별지가 강화될수록 존재로부터의 거리는 그만큼 비례하여 멀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노자는 사물의 형태에 의해서는 도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개념적 분별의식으로는 도를 알 수 없다고 함으로써 우리가 상대적 개념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자기존재에 대하여 집착하는 마음의 상태에서는 도를 인식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우리를 자기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사물의 고정된 실체성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또한 모든 개념적 분별이나 자기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도에 환원 일치되어 모든 대립을 싸고 넘어선 진리 그대로를 자각할 수 있다고 한다.

 

. 끝맺는 말

 

이상에서 필자는 노자가 중시하는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에 관하여 주목하고, 노자 특유의 역설의 언어와 만나 이를 존재론적 측면에서 해석해 보았다. 전통적인 존재론의 영역 안에는 존재와 인식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는 인식과 인식은 존재와 긴밀하게 연계된다. 존재 없는 인식이 불가능하듯이 인식에 근원을 두지 않은 존재란 무의미하다. 노자는 존재와 인식의 부정과 긍정이라는 이중적 맥락에서 자신의 존재론적 사유를 전개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자는 우주생성의 기원을 묻는 우주론 내지는 생성론적 세계관을 정립하기보다는 존재와 인식의 관계맺음의 방식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적 사유를 개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본고에서 노자의 도가 존재와 인식의 서로 다른 방향에서나마 근원적 자리에서 일치될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고, 여기에 논의의 초점을 맞춰 근원적 존재로서의 도와 관련된 존재와 인식의 상관관계를 밝혀보았다. 그리고 이들 존재와 인식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존재를 인식하는 두 가지 태도를 분별지와 명지를 통하여 살펴봄으로써 노자의 철학적 진의가 무엇인지 검토해 보았다. 그러면 이제 본문에서 살펴보았던 내용을 종합적으로 요약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도는 노자철학의 중심개념으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본원적 존재이며, 우주가 생겨나는 존재력이고, 만물이 운동 변화하는 법칙이며, 인간행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볼 때 도는 시간적으로는 선재성 즉 초시간적 존재이며, 공간적으로는 보편성 즉 초공간적 존재이며, 도 자체로 볼 때는 자재성 즉 독립상존하는 존재이다.85) 다시 말하자면 궁극적 존재로서의 도는 어떤 이름도 붙지 아니한, 어떠어떠한 것으로 서술되기 이전의 그냥 있는 존재로서 우리가 하늘이니 땅이니 하는 것과 같은 형태적 구별이나 명칭, 또는 높다 넓다 하는 식의 어떤 서술이 붙기 이전의 근원적 존재이다.86) 그래서 노자는 도를 형용하는 용어로서 자연의 개념을 도출한다. 이 때 자연의 의미는 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자연을 본받는 존재는 당연히 타자를 정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도는 자존적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러한 자존적 존재는 자신의 존재질서를 본받을 뿐 전연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2. 존재와 인식은 상호간의 존재근거로서 정립된다. 그래서 존재 없는 인식이 있을 수 없고, 인식 없는 존재가 정립될 수 없다. 그러나 노자는 존재 아닌 존재를 인식하려고 하고, 인식 아닌 인식으로 존재를 인식하려고 한다. 이러한 역설 속에는 존재와 인식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즉 존재의 범주 안에는 본원존재와 의미화된 존재가 서로 다른 차원이면서도 별다른 구분 없이 함께 거론되고, 인식의 범주에는 분별적 인식과 무분별적 인식이 다르게 존재하지만 이들 또한 구분 없이 이야기된다. 이 때 본원존재는 무분별적 인식과, 의미화된 존재는 분별적 인식과 서로 조응한다. 따라서 노자가 존재 아닌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의미화된 존재 아닌 본원존재를 인식한다는 말이며, 인식 아닌 인식을 한다는 것은 분별적 인식 아닌 무분별적 인식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인식에 있어서 서로 조응될 수 없는 분별적 인식과 본원존재가 교차되어 만나면 본원존재는 오히려 왜곡된 채 인식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낳는다. 마찬가지로 존재에 있어서 본원존재가 무분별지에 조응하지 못하고 분별지와 교차되어 만나면 본원존재의 일원론적 존재질서는 파괴되어 분열된다. 그러므로 노자철학에 있어서 존재와 인식의 관계는 그 이중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타자와의 차별적 관계정립을 의미한다. 그래서 노자는 존재와 인식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의 인식이 감각지각과 이성적 사유에 의한 분별적 인식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3. 노자는 존재와 인식의 상관관계를 통하여 우리의 감각지각적 한계를 지적함과 동시에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사유형식을 외계에 투사한 인식방법을 비판하며, 순수존재 또는 순수형상으로서의 도를 통찰하기 위한 방법을 역설적으로 제시한다. 즉 노자는 의식지향을 통한 분별지에 의해서는 도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개념적 분별의식으로는 도를 알 수 없다고 함으로써 우리를 상대적 개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사물의 독자적 실재성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개념적 분별이나 자기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근원적 존재인 도에 우리의 마음은 일치 환원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대립을 싸고 넘어선 진리 그대로를 자각하여 체득할 수 있다. 노자는 이러한 앎을 특히 명지라고 하는 데, 이는 항상 의식지향이 없음으로써 보는 태도에서 가능하다. 우리는 명지로부터 근원적 자재의 세계인 도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절대적 근원의 세계로서의 도와 현상 만유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현상의 세계로부터 도를 직관하는 중묘의 세계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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