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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째 인도.네팔여행기

달소래 2011. 11. 2. 22:31

 

10. 인도. 네팔 여행 10일 차(7월 28일)

일정 : 오전 9:00 아그라로 출발→오후 3:15 시크리 관람 US$5 + 50Rs (자마 마스지드→조디바이 궁전. 디와니암)→오후 5시경 타지마할 뒤 사진 촬영


어제는 간만에 술 한잔을 먹고 충분히 잔 것 같다. 날씨가 더워 술을 먹기에는 좋지 않지만, 한국에서 여름에 에어컨이 아닌 선풍기 속에서 술을 먹는 것으로 보면 된다.

 

 

시크리에도 역시 모스크는 있다. 이슬람 성자 치스티의 무덤이 있는 이 자마 마스지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침에 호텔을 나와 대절 버스로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서 이동을 했다. 아그라에 도착하기 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시크리 성을 갔다.
이곳은 이슬람교 사원인 자마 마스지드와 폐허가 된 올드 시티,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왕궁이 모두 가까운 곳에 모여있어 순서대로 있지만, 가이드가 없기에 지금에서 사진과 대조해보려 하니 기억도 가물가물 확실하지 않는 것이 많다. 왕궁으로는 조다바이 궁전. 황금궁전, 판츠마할 등이 있다.

시크리
유령이 도시, 버려진 폐허, 한 때의 수도로 말 할 수 있는 도시이다.

 

 

올드시티 시크리의 디와니암 앞의 연못. 가운데 홈이 보이는데, 이곳이 연못에 물을 대는 수로이다. 전형적인 장방형 약식의 인도 연못이다.

무굴의 3대 황제인 악바르에게 후사가 없어 고민하고 있는 왕에게 파테쁘르 시크리에 살고 있던 당대의 이슬람 성자 셰이끄 살림 치스띠가 이듬해에 후사를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해 공교롭게도 맞아 떨어졌다 한다.
왕은 기쁨에 성자에게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자 성자는 시크리를 발전시키고 융성하게 해줄 것을 요구해 왕은 수도를 건설하였다 한다. 하지만, 시크리는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에 너무도 물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이 살지 못하고 시크리가 수도로서 기능을 한 햇수는 고작 14년 밖에 되지 못하고 다시 아그라로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그 후 400년 동안 이곳은 폐허를 방치되었지만, 지금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조금은 관리가 되지않아 오히려 더 고풍스런 시크리성의 담에 앉아서 찍은 사진이다.


자마 마스지드 이슬람 사원.
이슬람 무굴 제국이 지배했던 도시에는 이슬람 사원이 있듯이 델리의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이슬람 사원의 높이가 무려 54미터에 달하는 입구를 지나면 우아한 대리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승리의 문’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1576년에 구자라트를 정벌한 악바르 황제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개선 문으로, 한쪽에는 코란의 한 구절,
“세상은 다리, 그곳에 집을 지으려 말고 지나가라. 순간을 원하는 이가 영원을 얻을 수 있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이 새겨져 있다.
건물 안쪽의 흰 대리석 건물은 황제에게 아들을 점지해 준 성자 치스띠의 무덤이 있어 오늘날까지도 아들이 없는 인도 여인들의 끝없는 기원이 이어지는 곳이다.

 

 

궁전의 벽에 새겨넣은 나무 그림. 벽화같지만 돌로 새겨넣은 것이다.


조디바이 궁전.
악바르 왕이 장남을 낳은 왕비 조디바이의 궁전이다. 조디바이 왕비는 원래 힌두교 출신으로 악바르 왕과는 정략 결혼을 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다른 두 문화의 결합을 의미하듯 건물의 기둥 부분은 힌두 형식, 돔은 이슬람 형식으로 지어져 있다고 한다.
궁전 내부는 붉은 사암을 나무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룬 것을 볼 수 있으며, 기둥의 아름다운 문양과 창틀까지 나무처럼 돌을 깎아 놓은 것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또 궁전 벽에 그려진 아주 화려한 꽃과 새는 돌에 새긴 것이 아니라 그려 넣은 것처럼 지금도 선명한 것을 보면 그 시대의 장인들의 놀라운 솜씨를 볼 수 있었다.

 

 

궁전의 내부 창틀. 꼭 나무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돌도 만든 것이다.


디와니 암.
인도의 다른 성과 같이 왕을 공식업무를 맡아보던 곳이지만,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건물 앞쪽에 마련된 파치시 정원 때문이다.
인도의 장기를 뜻하는 파치시라는 말에 걸맞게 악바르 왕은 이곳에서 장기를 두었다고 전해지는데, 제미있는 것은 정원 전체가 체스판이고 시녀들이 말의 역활을 맡았다고 한다.

판츠 마할
5층으로 이루어진 판츠마할은 황제의 시녀들이 머물던 곳이다.
시크래성에서 가장 개성적으로 손꼽히는 건물로 층마다 칸막이가 져진 좁은 방이 줄지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방의 수가 정확히 몇 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시크리의 디와니암에서 찍은 사진이다. 건축양식이 기둥은 힌두양식이고 지붕의 하얀 돔은 이슬람 약식이다.

다만 남아 있는 칸막이의 흔적으로 1층에는 대력 84개 정도의 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한방에 4명씩 잔다고 했을 때 삼백명이 넘는 시녀들이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제국치고는 오히려 적은 시녀들이 있었던 것 같다.

시크리를 구경하고 나서 차를 차고 또 아그라로 향했다. 5시경이니 조금 있으면 석양이 질 때이기도 하다.
타지마할의 정문을 보니 지금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야무나 강 쪽으로 갔다. 이곳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다. 뒤에서 보는 타지마할의 경치도 장관이다.
야무나 강 건너 백사장을 가기 위해 가이드가 뱃삯을 흥정한다. 잘 네고가 되지 않은 듯 처음의 가격으로 강을 건너기로 했다.

 

 

타지마할 뒷 쪽 아무나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오염된 물에 비친 사진이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만 보일 것이다.

강을 건너기 전의 타지마할 쪽도 쓰레기로 주위가 몸살을 하던데, 강을 건너와 보도 역시 모래가 검다. 강물도 검다. 고기는 한 마리도 없을 것 같다. 우리의 신선한 강바람과는 달리 바람에 실려 이상한 냄새가 계속 묻어 온다.
강의 오염이 정상수치를 넘은 것 같다. 우기가 되어 강물이 차면 씻겨 내려간다 고는 하지만 문제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검은 강물 위에 타지마할의 음영이 멋지다. 사진으로 보면 황홀하겠지만, 실제 사진을 찍는 사람은 공해에 시달리면서 웃음을 짓는다. 주위의 환경은 죽어가지만 야무나강의 황혼과 타지마할의 그림자는 말이 없다.

 

타지마할 뒤 편 강둑에 힛끗힛끗하게 보이는 것이 팻트병 등 각종 쓰레기 이다. 화려한 타지마할의 어두운 뒷 모습이다.


저녁에 호텔에 짐을 풀면서 지금까지 호텔 중 제일 후진 것 같은 느낌이다. 에어컨이 들어오는지 켰더니 안 들어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기를 절약하려고 10시 이후에 카운터에서 스위치를 올리는 것 같았다.
저녁은 각자 해결하기로 했다. 나와 룸메이트와 또 한 사람이 뭉쳐 음식점을 찾아 나섰다. 주위에 먹을 만한 음식점이 없다.
우리는 큰 호텔이 딸린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보니 우리 같은 배낭 여행자들은 없고, 그 호텔에 투숙한 말쑥하게 차려 입은 외국인들이 와서 부페로 먹는 레스토랑 이었다. 몇 가지 메뉴를 시켜 먹는 곳이 아니었다. 나는 나가자고 했으나 두 사람은 남고 싶어 하는 것 같아 혼자 나와 호텔을 나오니 조금 있다 두 사람도 나온다.

 

타지마할의 아무나 강의 황혼을 뒤로하고 모래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모래 색갈이 검으틱틱하다.


우리는 조금 떨어진 피자헛 집에 갔다.
들어와 보니 80-90%가 외국인이다. 우리의 일행도 10사람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고, 우리는 앉을 자리가 없어 서있는데, 갑자기 음악이 나오더니 남자 종업원 5명 정도가 줄을 서서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무슨 춤인지는 모르겠지만, 억지로 붙여본다면 막춤 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다른 나라의 피자헛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에 손님들의 시선 집중에는 성공한 것 같다. 이것 또한 인도만이 있는 문화일 것이다.  (2007년 8월 달소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