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판/좋은글.시

여보... / 김승희

달소래 2010. 10. 5. 10:39

 

 

 

손금이요

지문이다

같이 사는 동안

손금과 지문이 닮아졌네

배와 배가 만나야만 잉걸불이 탈 수 있는

배밀이 불새

 

-김승희, ‘여보’ 뒷부분(시집 ‘냄비는 둥둥’ 수록작)

 

얼마나 해로하면 손금과 지문조차 닮을까. 백년해로한 노부부의 능청스러운 관능이 압권이다. 배(腹)가 부싯돌이었다. 배와 배가 만나니 이른바 ‘정상 체위’였을 테고. ‘여보’와 ‘당신’이 배밀이로 생명을 점화시킨다. ‘잉걸불’의 사전적 뜻은 ‘활짝 핀 숯불’과 ‘다 타지 않은 장작불’이라 하는데 어느쪽이든 상관없겠다. 그리하여 2세(世)는 ‘불새’로 태어났다.

 

연애와 불륜이 희대의 유행이라 한다. 부부가 손금과 지문이 닮도록 함께 사는 게 오히려 개성적인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어떤 한 사람과 한평생 관계를 지속시키는 일생일대의 대실험 또한 인생을 걸고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때 호칭은 ‘오빠’가 아니라 ‘여보’일 테고, 체위는 후배위가 아니라 이른바 정상체위일 테고, 가스불이 아니라 잉걸불일 테고….

그나저나 ‘불새’야.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말아라. 축 늘어진 축축한 배가 불을 질렀다는 사실을.

 

<김중식기자〉

-경향신문에서 옮겨다 놓은 시입니다.-

'계시판 > 좋은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중한 사람이라면...  (0) 2011.02.21
님의 침묵  (0) 2010.12.07
먼 훗날 / 김소월  (0) 2010.07.16
김춘수 / 꽃  (0) 2010.01.11
눈오는 지도/윤동주.  (0) 2009.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