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판/칼럼.지식.정보

벗꽃 그늘.

달소래 2009. 4. 14. 13:21

 <다음 카페 "산과음악사랑"에서 쌍계사 벗꽃구경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꽃을 바라보며 사악한 음모를 꾸밀 수 있을까. 꽃나무 아래서 누군가에 대한 악의를 다질 수 있을까. 기쁜 노래를 슬픈 얼굴로 부를 수는 없다. 꽃의 미소를 머금고 누군가를 증오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밝게 웃는 꽃 앞에 서면 짐승 같은 마음도 순해진다. 꽃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꽃빛깔로 물들인다. 진달래꽃을 가슴에 품으면 분홍빛 연정이 돋아나고, 하얀 목련을 품으면 세상이 온통 환해진다.



봄꽃에 파묻힌 휴일이었다. 바람에도 꽃빛이 어리고, 햇살에도 꽃내음이 어렸다. 때이른 초여름 날씨 속에 나들이 나온 사람들 얼굴에도 꽃잎이 물결쳤다. 미당 서정주의 표현처럼 꽃의 향기는 ‘한강수나 낙동강 상류 같은 융융한 흐름’이고, 낱낱의 얼굴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다. 벚꽃축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여의도 윤중로에도 꽃향기가 강물처럼 흘렀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풍선처럼 떠다녔다. 사람들은 꽃 속으로 들어갔고, 꽃은 사람들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벚꽃을 스쳐온 바람은 노래가 된다. 벚꽃 그늘에 앉으면 흐린 삶도 환하게 피어난다. 이기철 시인의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이라는 시에 나오는 표현이다. 흐드러진 벚꽃을 가슴에 담으려면 세상일은 잠시 비워놓아야 한다.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직업도 이름도, 본적도 주소도 지워야 한다.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잊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벚꽃 그늘 아래에다 ‘두근거리는 생애’를 한 며칠 벗어놓으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은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다. 시집 제목처럼 ‘나’를 지우고 벚꽃 그늘에 앉으면 사람도 세상도 꽃처럼 아름답다.

봄꽃은 잠깐이다. 피는가 싶으면 어느덧 진다. 산수유 눈웃음 짓는가 싶더니 진달래 지고, 개나리 자지러지는가 싶더니 목련이 뚝뚝 꽃잎을 떨군다. 저 화사한 벚꽃도 미처 눈에 다 담기도 전에 어느새 지고 있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벚꽃은 ‘잠깐 사이에/ 잠깐 사이로’ 떨어져 짧은 봄날에 ‘하얀 마침표’를 찍는다.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서둘러 꽃 한송이 가슴에 담아 보자. 꽃은 가도 ‘하얀 마침표’는 남아 두고두고 추억을 환하게 밝힐 것이니.

<김태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