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은 간신히 했다.
하루 저녁을 잤는데도 어제 삔 다리의 통증이 쉽게 가라않지 안는다.
돌아다닐 수도 없고 어제 찍은 핸폰 사진을 컴에 저장해 놓으려니, 컴이 구닥다리여서인지 삼성Kies 프로그램이 잘 뜨지 않는다. 두어 시간을 싸웠나? 이제야 사진을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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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묘에 술 한 잔 따르고, 솔나무 그늘에서 상념에 잠겼다.(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어제는 오전 9시 쯤 일이 끝나 화성에 가는 길에 휘발유값도 아낄 겸, 시골 성묘를 미리 갔다. 올라오다 만날 사람도 있는데, 일거양득 일 수도 있다. 햇빛은 아직 뜨겁지만, 그늘에 들어서면 시원한 바람에 이마의 땀을 식힐 수 있어 괜찮다. 하늘의 파란 하늘과 뭉개구름은 도시의 찌든 마음을 탁 트이게 만들어 홀로 큰소리로 아무소리라도 외치고 싶어지는 날씨이다.
공주를 지나 금강 변을 지나 새로 난 도로로 부여로 향했다. 4대강 사업 중의 한 공구인 듯한 금강의 물이 전에 왔을 때보다 많아 금강의 엣 모습을 보는 듯해 좋았다. 전에 왔을 때는 지금쯤의 금강은 물이 없어 모래바닥을 흉물스럽게 드러내놓았는데, 가득한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새로운 강의 보는 것 같고, 풍요롭게 보였다. 아직은 공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공사가 마무리 되면 새로운 금강의 모습을 보여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관광자원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
부모님이 모셔져 있는 선산이 있는 곳은 부여읍내에서 능산리 고분 쪽으로 가기 전에 위치해 있어, 간단히 성묘를 드릴 술과 안주와 음료수를 읍내에서 준비해 산소를 갔다. 작년에 왔을 때는 벌초를 하지 않았는데, 올해는 일찌감치 동생이 벌초를 해 놓았는지 산소가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어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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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묘소에서 내려다 본 전망. 좌청룡 우백호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 (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술을 따르고 아버님과 어머님의 묘소에 절을 하고 잠시 소나무 그늘에 땀을 식힌다. 잠시 묘소 앞에 펼쳐진 먼 산을 바라다본다. 그 옛날, 내가 어렸을 때,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좋은 묘 자리는 좌청룡 우백호에 멀리 보이는 봉오리가 있어야 한다“ 부모님의 묘 자리가 좋은 자리인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좌우의 산줄기를 청룡과 백호의 기상을 받은 자리라고 생각해 본다. ^^
남은 술을 홀로 컵에 따라 한 잔 마셔본다. 잔디밭에 무언가 꿈들 거리는 곤충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방아땅개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메뚜기 보다 큰 풀무치와 검은 반점으로 위장을 한 메뚜기(옛날에는 송장메뚜기라고 했다)도 눈에 보인다. 어렸을 때, 논에서 메뚜기는 잡아먹었어도, 산에서 보는 풀무치와 송장개비는 먹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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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개장한 백제문화단지. 아직은 공사가 완공이 되지않았다. (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중고등학교 때는 유학을 해 시골의 산소를 가지 못했지만, 국민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성묘를 할 때도 똑같은 풀무치와 송장메뚜기들이 산길을 가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날아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 때의 생명은 아니겠지만, 지금도 똑같은 형태의 곤충을 본다는 것에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이리 저리 뛰고 있는 곤충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몇 십 년 전, 아니 몇 백, 몇 만 년, 몇 억 년 후 까를 생각하면 우주의 생성까지 추론할 수 있는 인간 자체는 위대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허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허무와 무력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도, 아무도 없는 산에 살아 있는 생명들이 있으니 영원히 무덤에 계신 부모님도 외로움이 덜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시계를 보니 3시경. 올라올 때 볼 사람이 있는데, 바쁜지 연락이 없다. 시간이 없으면 다음에 보자면 되지, 누가 잡아먹나? ^^ 내가 상대를 알기에 그냥 넘어가지만, 여느 사람 같으면 벌써 일이 났어도 벌써 났을 것 같다. 저녁을 하기로 했는데, 너무 일찍 올라가면 되돌아오는 것도 낭비이고, 이 기회에 부여의 볼거리를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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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의 동상. 옛날에 봣을 때는 큰 것으로 봤는데, 너무 작은 동상이다. (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부여의 낙화암과 부소산은 옛날 국민학교 시절 고학년의 소풍 코스로 많이 왔던 장소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많은 고고학적 발굴이 되어 새로운 곳을 많이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 옛날 1960년대 국민학교 시절에 보았던 것과는 많이 변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도 발굴터에 집을 지어 박물관을 만들어 놓고, 궁남지도 아름답게 꾸며 놓았고, 부소산성의 여러 곳도 누각과 정자를 새로 세워졌다.
특히 작년에 백제문화단지를 조성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 같다. 그런데, 백제문화단지에 가보니 개미새끼도 없다. 두어 사람이 있다가 금방 사라진다. “뭐야? 2010년 개장했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없나?” 무슨 일이 있나하고 매표소 쪽으로 가보니 월요일은 휴일이란 팻말이 있다. 그래서, 입구 정문을 핸폰으로 사진 찍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려고 한다. 난 잽사게 달려가 육중한 문을 닫으려고 하는 수위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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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의 포룡정. 버드나무가 정취가 있다. (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죄송합니다. 잠깐만 들어가 왔다는 기념사진 쪽 찍을 수 없을까요?” “오늘은 휴일입니다. 문을 열면 안 됩니다.” “부여에 성묘하러 왔는데, 백제문화단지 개장했다고 해서 휴일인지 모르고 왔습니다. 일분이면 됩니다.” 찝찝해 하는 수위를 멀리서 왔다는 핑계로 무조건 들이대니 마지못해 허락을 한다. 한 30여초 시간이 걸렸을까? 수위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니, 그 사람도 잠깐인데, 너무 야박하게 굴었다고 생각했는지 오히려 미안해한다. 백제문화단지는 아직도 공사 중이라 몇 년은 더 있어야 숙박시설 등 편의시설이 완공될 것 같다.
백제문화단지를 뒤로하고 부여읍내에 위치한 계백장군 동상 옆에 있는 궁남지를 가지로 했다. 계백의 동상은 국민학교 때만 해도 동상이 없었다. 그 때는 소풍 코스로는 부소산의 낙화암과 정림사지의 탑과 그 옆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상이 고작이었다. 부소산성의 군창터에서는 땅을 파면 몇 개의 불에 탔다고 하는 새까만 굴량미를 찾아내면 여러 친구들이 보려고 몰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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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에서 찍은 사진. (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1979년 10월 김종필에 의해 계백동상이 세워졌으며, 망해가는 백제를 구하기 위한 계백을 포함한 5천 결사대의 넋을 생각하면 지금도 보는 사람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궁남지는 계백장군의 동상에서 한 5백여 미터 떨어져 있다. 궁남지(사적 제 135호)라는 이름은 삼국사기 “무왕조에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 긴 수로로 끌어 들였으며 주변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다“ 라는 데서유래 하였다. 포룡정(抱龍亭) 정자 이름도 백제 제 30대 왕인 무왕의 어머니가 홀로 되어 부여 남지(南池) 주변에 살던 중 교룡이생소명서동(交龍而生小名薯童) 즉 ”용과 관계하여 서동을 낳았다”는 삼국유사 기록에 바탕한 것이다. 이처럼 백제 무왕 35년(서기 634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 궁납지는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궁남지 한가운데에는 신선과 불로초 황금으로 된 궁궐이 있는 이상향인 방장신산(방장신산)을 본뜬 산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1965년 12월 복원이 시작되어 총 구천육백오평의 연못을 보수하였으며 1971년 12월에 정자를 중건하고, 나무다리를 놓아 면모를 갖추게 되엇다. 2005년 5월 고증을 바탕으로 보수 단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상 포룡정기 현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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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정의 전경.(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현판을 보기 전에는 인공으로 만든 호수라는 것을 몰랐는데, 당시 백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큰 공사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공호수라고 하면 중국의 서호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단어에서도 지(池)와 호(湖)의 차이가 나지만, 중국의 규모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곳곳의 정자와 나무 그늘에는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도 나누고, 소주 한 잔도 마시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관광으로 중국 각지의 사람들로 아수라장을 연상케 하는 서호 보다 정감이 가서 좋다.
부여는 천년의 고도 신라의 서울 경주와는 규모에서도 작고, 볼 것도 많지 않은 것 같다. 몇 개의 고분군도 가보고 싶지만, 시간도 많지 않아 규암의 수북정만 가보기로 했다. 어렸을 때는 이곳도 백제의 유적으로 생각했는데, 조선시대에 세워진 곳이라고 한다.
수북정은 부여팔경의 하나로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동에는 부소산(扶蘇山)과 나성(羅城)이 있고 정자 밑에는 백마강(白馬江)이 맑게 흐르고 있다. 이 정자는 조선 광해군(1608∼1623) 때 양주(楊州) 목사(牧使) 김흥국(1557∼1623)이 건립하였다 하며,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 불린다. 김흥국 목사는 인조반정을 못마땅하게 여겨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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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정 왼쪽에서 바라본 백마강. 멀리 오른쪽에 부소산성이 보인다..(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김흥국(金興國)은 김장생(金長生), 신흠(申欽) 등과 친교가 매우 깊었으며, 지금도 신흠의 수북정(水北亭) 팔경시판(八景詩板)이 걸려 있다. 수북정 아래쪽에 있는 자온대(自溫臺)는 백제시대 왕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할 때 이 바위를 거쳐가곤 했는데, 왕이 도착할 때마다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구들돌이라 명명했다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자온대라 불려오며, 암벽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자온대(自溫臺)라고 쓴 친필이 음각 유존(遺存)되어 있다.
수복정에 올라와 시원한 가을바람을 쏘이면서 예나 지금도 변함없이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 본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부여보를 설치해서인지 전에 보다 강물이 많아서 좋다. 웬 쪽에는 멀리 부소산이 보이고 그 옆을 백마강이 말없이 흐른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 백마강 한 가운데에 있는 조롱대에서 용을 낚았다는 전설을 백마강은 아는지 모르는지... 지나온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을 해서 당나라를 멸했다면 한반도의 역사와 세계사가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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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공산성에서 한 컷. 마침 저녁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고 있다.(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대충 부여의 볼 곳은 다 본 것 같다. 가는 길이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과 국도로 천천히 가는 방법이 있다. 아무래도 고속도로를 앞만 보며 긴장하고 운전하는 것보다 주변의 경치도 구경하고 여유롭게 가는 국도가 좋은 것 같다. 국도로 공주까지 가고 천안에서 고속도로를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운전을 하다 보니 내려왔던 길과 다르게 공주까지 왔다. 금강을 건너지 전에 오르쪽에 성곽이 보인다. 그 유명한 공산성이다. 과거에도 몇 번 그저 스쳐만 갔는데, 저녁 먹을 사람이 연락도 안 오는 것을 보니 이미 틀린 것, 산성에 오르기로 했다. 막 산성의 오르막길에 들어서려니 한 쌍의 연인이 걸어온다.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에 부탁을 해본다. ^^ “죄송합니다만, 사진 한잔 부탁해도 될까요?” 쾌히 승낙하며 사진을 찍어 준다. 그것도 가로 세로로 구도를 잡으면서 찍는다. 순간 미안한 생각이 들며, 두 사람이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한다.
오늘 저녁은 유난히도 공기가 맑은 것 같다. 햇살도 투명하고 가시거리도 태풍이 지난 다음 날 같이 먼 산도 눈앞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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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하루의 마지막 가을 햇볕을 대지의 온갖 생명체에 나누어 주듯 유난히도 밝고 선명한 햇살이 공산성을 비추고 있다. 그 화사한 빛의 조화에 이끌려 구둣발로 거친 산성의 비탈길을 단숨에 정자에 올라섰다. 좌우편 굽이굽이 펼쳐진 금강의 물줄기와 가을저녁 햇살에 어울려진 공산성의 절경은 부여 사비의 백마강보다 경관이 더욱 뛰어난 것 같았다. 정자에서 내려오면서 바라보는 공산성의 성문은 인공으로 조명을 받은 것처럼 석양의 햇살이 그곳만 비추는 것 같아 환상적 이다. 마침 한 사람이 걸어와 “공산성의 석양”이란 사진 제목도 될 것 같아 몇 발을 내려오는 순간, 발을 헛디뎌 왼쪽 발을 접 질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주저앉아 한동안을 걷질 못했다. 절둑거리는 다리로 가까스로 내려와 화장실에서 찬물로 맛싸지를 하니 조금 고통이 자자든다. 그래도 왼쪽 발목 이라 다행이다. 오른쪽 발목였다면 운전에도 지장이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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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에서 내려오다 저녁 햇살의 성문에 취해 내려오다 발을 헛디뎠다.(크게 보시려면 사진을 눌러주세요) | 서울로 올라오는 길, 천안에서 고속도로로 들어서야 하는데, 잘못 들어 오산까지 국도로 왔다. 월요일이라선지 넓어진 국도에다 밀리지도 않아 수월하게 집에까지 왔다. 오늘 어제 성묘에서 가지고 온 술을 저녁에 먹으면서 문득 생각나는 말이 있다. “산에서 사용한 음식은 집에 가지고 오면 좋지 않다”는 말이다. 성묘 때 무심코 가지고 온 술 때문에 공산성에서 발목을 삐었나 하는 나답지 않은 생각을 해본다. ^^ (2011년 9월 달소래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