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떠난 성묘.
어제 토요일 아침 바람도 쐬이고 싶은 마음에 훌쩍 차를 몰고 설날 성묘를 미리 갔다.
날씨도 춥지 않고 외출하기에 좋은 날씨여서 부여까지 가는 길이 어렵지는 않았다. 딱이 빨리 가야할 이유가 없어 고속도로로 보다는 국도로 경치도 구경하기 겸, 드라이브 삼아 가기로 했다.
국도로 가다 보니 천안에 가기 전 까지는 구경할 거리가 없다. 도로옆에 건물들이 들어서 있거나, 고층 아파트가 눈에 들어와 그저 서울의 외곽지역을 지나는 것 같아 드라이브 하는 맛이 없다.
아산을 들어서면서 부터 주위에 산도 보이고 나무도 보이니 이제서야 서울을 빠져나온 것 같다. 좁은 국토임을 실감하게 된다. 중국과 비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지만, 몇 달 전 자동차를 타고 중국을 여행한 기억이 난다. 몇 시간을 가도 사람들을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산소에 도착전 편의점에 들러 아버님이 좋아 하시던 따끈한 정종 대신 청아 한병, 진설 대용으로 한과와 약과가 포장으로 되어있는 것과 술을 따를 컵을 샀다.
산소 올라가는 길이 많이도 변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육촌 형님이 선산을 지키며 살고 있는 집을 들러 산소를 갈 수 있었는데, 가는 길을 기업체가 들어와 길을 막었기때문에 돌아들어가야하는 불편이 있다.
두 봉분에 사가지고 온 약과를 끄르고 정성스럽게 술을 따르고 절을 하고, 사업이 잘 되길 기대한다.
성묘를 마치고 술을 따르고 남은 술을 한 컴을 마셨다. 산위의 싸늘한 날씨에 술 먹은 것 같지가 않다. 올해부터는 변수도 많다. 더 많은 시련이 닦칠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온다. 카페 활동도 지장을 받을 것 같다. 새로운 다짐을 해본다.
주위의 봉분을 보니 몇 년 전에 돌아가시 사촌 형님의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내개 묻힐 장소를 생각하곤 자리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내가 죽으면 딸아이들도 올지 않올지 기약이 되지도 않는 것, 그저 육신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 화장을 하여 수목장이나 아이들이 가까이 찾아 올 만한 곳에 유골을 놓으라 하고 싶다.
추석과 설날이면 아버지와 같이 이곳 선산의 할아버지, 할머니, 고조, 증조할아버지까지 산소를 돌던 기억이 난다. 장남은 조상들의 산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며 이곳 저곳 알려주셨는데, 어린 나에게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커서도 세파에 시달리다보니 찾아보지 못해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님의 산소밖에 모르니 대장손과 역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내 뒤로 2, 3대 후손들이 내가 어디에 묻혔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과분한 욕심인지도 모른다.
지금 논산에 가서 친구만나 저녁하기엔 이른 시간인 4시 반경.
초등학교 시절과 그 뒤 몇 번 부여를 온 기억이 있어 시내를 구경하고 싶어진다. 60년대 부여와 귀암을 잇는 큰 다리인 백제교는 여렸을 때에 구경온 기억도 있어 백제교를 가려고 출발을 했다. 그런데, 도중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유적지란 팻말이 들어온다. 고풍스런 집도 지어져 있고 잘 꾸며진 옛날 기와집도 보여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옛날 초등학교 시절의 5층 석탑과 버림받았다는 못생긴 부처님의 좌상을 보기위해서이다.
정림사지를 들어서니 멀리 5층석탑만 보이고 부처님 좌상은 보이질 않는다. 후에 박물관의 큐레이터에게 들은 소리였지만, 보관상 건물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시간도 보낼 겸 박물관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그리 비싸지않은 1500원. 입구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다. 이럴것 같으면 그냥 들어와도 됐을 것을...
한 10여분을 박물관에 전시해 놓은 유물과 설명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퀘레이터(안내자)의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잘 됐다 싶어 그 쪽으로 합류해 설명을 듣기로 했다. 초등학생과 그 학부모인 듯한 30대 여인, 두사람을 위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백제에 불교가 전파 된 유래에서 부터 석탑을 쌓는 방법, 기와를 만드는 방법, 정림사지의 발굴현장, 사비성의 사찰 현황, 그 당시의 의상등 여러가지를 설명해 주었다.
한 예로 탑의 유래에 대한 설명인데,(내가 인도에 가지전에 여기를 왔으면 더 많은 도움이 됐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탑은 인도에서 부터 스투파(인도와 티벹에서 이 뜻을 몰라 한참을 헤멨다.)라는 말로 돔형식으로 벽돌을 쌓아 올려 놓았고, 중국은 벽돌로 쌓은 팔각형의 탑으로 변했고, 우리나라는 돌로된 사각의 탑으로, 일본은 목조로 된 사각의 탑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곳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박물관 폐문시간인 5시까지 구경하고 친구와 저녁을 하러 논산에 갔다.
초등학교 친구라서 사는 모습도 다양하다. 양복점 운영하는 친구와 정미소를 운영하는 두 친구에게 연락을 해 놓은 상태이다. 아직도 시간이 많아 먼저 양복점을 하는 친구에게 가기로 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서울 생활과는 달리 양복점에 들어서니 친구는 일을 하고 있고, 손님들이 가계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늘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바쁜 것이 없고 긴박감이 없어 보인다. 고스톱 구경을 한시간 했는데도 방아간하는 친구에게 연락이 없다. 나중에 연락하니 내 전화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우리들 세명은 저녁도 먹기겸 고기집으로 들어갔다. 시키다보니 삽겹살이다.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화제의 빈곤을 느낀다. 허긴 하는 일이 다르니 있을 수 있지만, 시골에 사는 두놈은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듯, 정미소 일에 대한 이야기를 곧잘 재미있게 한다.
세명이서 소주 세병을 먹었나? 친구들과 술을 먹으면 약해진 소주 이기에 각 2병씩은 먹어야하는데 많이 먹은 술은 아니다. 정미소 하는 친구놈이 며칠 바쁜일이 일이 입술도 부르텄다고 한다. 하루에 100여가마를 짊어지기가 옛날 같지가 않다고 한다. 허긴 내경우에도 지난 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 산을 탔다고 입술이 부르텄으니 몸이 마음같이 움직여 주질 않는 것 같다.
2차를 들러 감자탕에 소주에 밥을 먹다. 술 한병을 먹으니 더 들어가지않는다.
친구들과 나와서 헤어지고 밤 11시경 찜징방에 가다.
동생집에 가고 싶지만, 동생은 서울에서 일하기때문에 제수씨만 있는집에 들어가는 것이 보기에도 좋지않아서이다.
찜질방 카운더 아가씨가 묻는다.
"술 먹었어요?"
술 먹었는지는 언뜻 보아도 알아 볼 것 같았지만 묻는 말이 형식적이다.
"안 먹었어요."
전에 술 먹고 많이 취했을 때는 찜질방에 들어가지 못한 적이 있기때문이다. 카운터가 믿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저 넘어가는 것 같았다. 지금 이시간에 찜질방 오는 사람들이 술 안 먹고 오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많이 취해 사고 내지 않을 것 같은 사람만 들여보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망신을 당할 뻔 했다. 찜질복과 덮을 것을 옷장에 넣고 목욕탕에 들어가려고 웃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좌측에 여탕이란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라 도로 일층으로 내려와 자세히 보니 2층은 찜질복을 입고 올라가는 곳이고 남탕의 목욕하는 곳은 1층에 표시되어있는 것이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없었기에 천만다행이었지 홀딱 벗은 알몸을 여자들에게 보였을 뻔 했다. 이래서 술 먹은 사람들을 들여보내지 않는지도 모른다. ^^
다음날 2월 3일 아침 눈을 뜨니 아침 9시.
그래도 어제 술을 많이 먹지 않아 몸이 거뜬하다. 아침에 사우나에 들러 몸을 풀으니 몸이 날아갈 것만 같다.
상쾌한 마음으로 해장국을 하고 오후 2시경에 집에 돌아오다. 작년 추석이후 산뜻한 고향나들이였다.
(2008년 2월 3일 달소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