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추억의 사진첩

중학교 졸업사진.

달소래 2009. 5. 23. 00:36
 

 

 

1967년 2월 중학교 졸업사진이다.

아버지는 바쁘셔서 못 오시고, 어머니만 졸업식장에 참가하신 사진이다.

어머니가 옆에 끼고 있는 것은 우등상 상품이고, 내가 끼고 있는 것은 졸업장통과 우등상장, 그리고 앨범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다. 그런데, 기억들이 하나 둘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마도 총명할 때의 추억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대전 중학교 시험을 치던 날 아버지가 잘 아는 여관집에 여장을 풀고 영화관에 간 기억이 난다. 공포 영화인데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저 아버지를 따라 대전 중학교를 봐서 떨어진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그리고 2차 충남중학교를 간신히 들어갔다. 아마도 초등학교 때 남자 여자 두개이 반에서 부반장을 했지만, 실력이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허긴 그 때 일명 과외라는 모임이 막 생겨 다른 아이들은 모임도 다니고 과외공부를 했었는데, 나는 그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입학시험을 봤으니 시원치 않을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김우중 선생님은 그저 전과를 칠판에다 빡빡하게 써 놓고 공책에 베끼라고만 한 기억이 난다.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대전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부모님이 계시는 논산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는데,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충남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다행이 누님도 대전여고에 합격을 해서 나는 누님과 자취를 하게 되었고 자취방을 대흥동, 신안동, 자양동으로 세 번씩이나 옮기게 되었다.


대흥동에서 다닐 때에는 개천 옆에서 자취를 했는데, 걸어가는데 40분을 걸렸을 것 같다. 당시에는 1시간 이상을 걸어오는 아이들도 있었기에 그렇게 멀지는 않았지만, 1년 후 신안동으로 자취방을 옮겼다.

신안동은 대전역 근처였는데, 조용한 저녁때면 기차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집에 가고 싶어 저녁달을 보고, 또는 별을 보며 향수를 달래곤 했었다.


지금까지 초. 중. 고. 대학교 18년을 다니면서 중학교 시절 제일 공부를 잘했던 것 같았다. 학창시절을 돌이켜보건대 범생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중학교 때 공부를 제일 잘 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반에서 1.2등을 하다가, 3학년 때에는 줄 곳 졸업할 때까지 반에서 1등은 도맡아 했고 전교에서 5등 안에는 들었기 때문이다.

허긴 그때에는 학교에 갔다 오면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밖에 나가 놀 친구나 장소도 없어서 집에서 책만 봤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그래도 중학교를 다니면서 몇 가지 기억나는 것은 있다. 일학년 때 시골에서 왔다고 깔보는 친구와 싸움을 하려고 하다 말은 일이며, 방과 후가 되면 인원수도 몇 명 못 들어가는 조그만 도서관에 뛰어가 줄을 섰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도서관을 큰 곳으로 옮긴 후에는 줄을 설 필요는 없었지만, 그 도서관에서 임꺽정소설 사건이 생각난다.

우연히 몇 권으로 된 임꺽정 소설을 도서관에서 접하곤 당시에는 적나라한 성적묘사가 계속해서 그 소설을 신청해 다 읽은 적이 있다. 나중에 도서반원이 그 책에 성적인 묘사장면이 있다는 것을 선생님에게 말해 그 책을 읽은 사람을 찾는 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도 도서카드에 이름이 적혀 그 당시에는 좀 불안하고 창피스러웠지만, 선생님으로부터 아무런 말을 듣지 않고 그냥 지나갔던 일이 있었다. 아마도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사춘기의 호기심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의 나는 좀 조숙했는지도 모른다. 키도 큰 축에 속해 2학년 때 56번, 3학년 때는 52번 였으며, 점심 먹고 휴식 시간이면 학교 들어오는 입구의 평행봉 옆에서 큰 아이들끼리 모여, 나에게는 생소한 삼류 연애소설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시골에 갔다 올 때면 지금은 이름은 잊었지만, 몇 번 마주친 대전여중에 다니던 여학생을 사모했으며, 내 책꽃이에는 모나리자의 흑백사진을 붙여놓고 그 묘한 웃음을 좋아했으며, 누님이 보던 겉장이 헤진 영국. 프랑스, 독일의 번역 서정시집은 고등학교 때까지 가지고 다녔다. 생생한 기억: 자양동 화장실 창으로 아주머니가 얼굴을 디밀며 쳐다봤던 황당한 일.


지금도 운동은 좋아하지만, 그 때 중학교 때에도 운동은 좋아 했던 것 같다. 아니 운동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아버지께서 서울에서 그 때는 귀했던 가죽 축구공(주부에 바랍을 넣고 손으로 동여매기 때문에 주부꼭지와 그것을 맨 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축구공.) 사다 주어 엎드리면 코 닿을 학교에서 온 종일 공을 차며 놀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초등학교 때 논산읍 대표선수로 성동초등학교와 축구를 한 적도 있었다. 일학년 전체가 1000m 오래 달리기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충남중학교는 야구 운동 선수도 있었는데, 내기 7등으로 들어와 나도 놀란적이 있었다.

여하튼 운동을 좋아했던 나는 틈틈이 평행봉을 했고, 그 곳에서 물그나무와 회전을 할 정도까지의 수준까지 갔으며 놀이에도 빠지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당시엔 철봉을 넷트 삼아 양쪽에 사각형을 그어놓고 조그만한 고무공으로 배구놀이가 방과 후에 유행였는데 김종환과 짝이 되어 둘이서 늦가울 손 시러운 줄도 모르고 어둑어둑 할 때까지 그 놀이에 빠진 적이 있다.

최근에 충학교 창립 50주년에서 김종환이를 만나서 그 시절 배구 놀이를 말하며 즐거워한 적이 있다.


물상 공부 100점. 영어 발음의 중요성. 영어 독일어 발음, 수학 얼간이의 아이큐와 공부, 수학과외에 대한 보복, 손사장의 회상. 많은 기억들이 난다.


50주년 때 본 중학교 주변 많이도 변했다.

시간이 되면 대전에 가고 싶다. 대흥동, 신안동, 자양동. 내가 자취하며 어린 추억이 서린 곳이다.